공산주의자동맹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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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은 1958년 일본공산당에서 분리된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사상으로 내세웠으며, 일본공산당의 노선을 비판했다. 1960년 미일안보조약 반대 투쟁 이후 분열되었으며, 이후 여러 분파로 나뉘어 활동했다. 적군파는 무장투쟁 노선을 추구했으며, 전기파, 반기파, 상황파 등 다양한 분파가 존재했다. 1970년대 이후 신좌익 운동의 퇴조와 함께 분트는 쇠퇴하였고, 일부 분파는 시민단체나 우익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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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동맹 (일본)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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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상
1958년 1차 분트 결성대회 의안은 "착취, 빈곤, 억압, 복종의 절멸과 인간의 진정한 해방을 의미하는 세계 공산주의 혁명", "대중적인 혁명당의 결성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전통" 등을 주요 사상으로 내세웠다.[65] 이들은 "오늘날 모든 공산주의당은 평화 공존과 일국 혁명의 절대화, 세계 혁명의 포기에서 그 본질은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일본공산당의 "배반적 성격"과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의 "혁명적 이론 결여"를 비판했다. 또한 "기존의 모든 당에 신뢰를 두지 않고", "하나의 바위와 같은 단결의 신화를 버리고", "조직 앞에 강령"이 아닌 "실천의 불의 시련 속에서 진실의 강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65]
1950년대, 일본공산당은 한국전쟁 발발(1950년)과 코민포름의 비판 등으로 인해 노선 갈등과 분열을 겪었다. 미야모토 겐지의 주도로 무장투쟁 노선을 폐기했지만(육전협), 당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6]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및 헝가리 혁명 무력진압은 일본 공산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9년 8월 제3회 대회에서 채택한 약관에는 "일국의 사회주의건설의 강행과 평화공존정책으로 세계혁명을 배신한 기회주의 조직으로 타락한 공인된 공산주의 지도부(스탈린주의 관료)와 이론적, 조직적으로 스스로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그것과 비타협적인 투쟁을 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전 세계에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고, 세계 혁명의 일환으로 일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위해 투쟁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66]
1966년 재건된 2차 분트의 기본 노선은 다음과 같았다.[67]
# 국제금융위기 등 세계자본주의의 전후체제의 동요가 시작되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적당한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
# 그 일환으로 일본의 전후민주주의 체제도 동요하기 시작하고 혁명이냐 반혁명이냐의 계급적 사투 시대의 과도적 단계가 형성되고 있다.
#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인민은 "삶과 권리의 실력방어"를 반제 투쟁으로 조직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망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 프롤레타리아 일본 혁명의 승리는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의 전망을 연다.
# 현대 일본의 혁명당의 의식성은 "반제 투쟁을 프롤레타리아 일본 혁명으로!", "일본 혁명을 아시아 혁명의 승리와 세계 혁명의 돌파구로!" 등의 슬로건으로 제시된다.
사상가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1960년 60년 안보 투쟁 당시 전학련 주류파와 함께 활동하며 분트의 활동에 이론적 영향을 미쳤다. 요시모토는 국회 구내 항의 집회에서 연설하고, 경찰관과의 충돌로 체포되기도 하는 등 국가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을 옹호했다.
3. 역사
당시 전학련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일본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7] 1958년 12월, 일본공산당에서 분리된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을 결성했다.[8] 세계 최초로 공산당에서 이탈한 좌익이라고 한다. 초기 지도부는 코야마 켄이치, 모리타 미노루였지만, 곧 시마 시게오, 아오키 마사히코, 시미즈 타케오, 키타코우지 사토시 등의 젊은 그룹으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강령은 따로 만들지 않았고,[9] 기관지에 게재된 매니페스토로 대신했다. 조직은 엄격한 전위당 중집체제를 강요하지 않고 느슨한 편이었다. 이는 조직화도 대중투쟁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발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10]
1959년 6월, 분트 맹원 카로우지 켄타로[11]가 전학련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1960년까지 분트가 전학련을 주도하게 된다.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일미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추진하면서, 일본 사회는 큰 논란에 휩싸였다. 분트는 이러한 상황에서 전학련을 주도하며 안보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1960년 7월, 미일 안보 조약 저지를 위한 안보 투쟁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 속에서, 전공투는 여러 파벌로 분열되었다.[17] 이 투쟁을 경계로 분트는 중앙에서 말단 세포에 이르기까지 해산 상태에 빠졌다.[17] 이후 분열된 파벌들은 신좌파의 여러 학생 "파"를 형성하였고, 1968–69년 일본 대학 시위, 1970년 안보 투쟁,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반대 투쟁인 산리즈카 투쟁과 같은 활동을 벌였다.
1960년 7월, 전국적인 분트 조직이 분열된 후에도, 간사이 지방에서는 '간사이 지방위원회'가 분열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1962년에는 '간사이 공산동'(간사이 분트)이 결성되었다.[24] 간토에서는 분트가 아닌 이른바 '하부 조직'인 사학동(사회주의 학생 동맹)의 결성이 다양한 배경을 가지면서 극소수의 인원으로 진행되었고,[25], 최종적으로 주오 대학·메이지 대학을 중심으로 한 독립 사학동[26]이 간사이 분트와 1965년 6월, 통일위원회를 형성했다.
이와타 히로시의 '세계 자본주의론'을 기반으로 한 마르크스주의 전선파(마르전파)[27]가 통일위원회와 합동하여 1966년 9월, 재건 제6회 대회를 열어 제2차 분트가 결성되었고,[28] 이와타 히로시의 『세계 자본주의론』, '생활과 권리의 실력 방위' 등의 내용이 강령적인 내용이 되었다.
제2차 분트는 이후 다른 두 급진 학생 분파인 중핵파와 해방파와 합류하여 1960년대 후반에 여러 차례 폭력적인 시위 활동을 벌인 "삼파 전학련"(''Sanpa Zengakuren'')을 결성했다.
1960년대 후반의 격렬한 정치 활동은 1967년 10월 8일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베트남 방문 저지(제1차 하네다 사건)에서 시작되었다.[32]
1969년, 시오미 다카야가 이끄는 적군파가 분트에서 분리되었다.[52]
1970년 6월, 도시마 공회당에서 열린 정치집회에서 반기파,[55] 정황파,[56] 아라 타이스케의 전기파[57]가 공개적으로 대립했다.
이로써 제2차 분트는 재건 4년여 만에 완전히 분열되었고,[58] 여러 정파로 분열되어 전체적으로 세력을 잃었다.
3. 1. 제1차 분트 결성 (1958년)
1950년대, 일본공산당은 한국전쟁 발발(1950년)과 코민포름의 비판 등으로 인해 노선 갈등과 분열을 겪었다. 미야모토 겐지의 주도로 무장투쟁 노선을 폐기했지만(육전협), 당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6]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및 헝가리 혁명 무력진압은 일본 공산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전학련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일본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7] 1958년 12월, 일본공산당에서 분리된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을 결성했다.[8] 세계 최초로 공산당에서 이탈한 좌익이라고 한다. 초기 지도부는 코야마 켄이치, 모리타 미노루였지만, 곧 시마 시게오, 아오키 마사히코, 시미즈 타케오, 키타코우지 사토시 등의 젊은 그룹으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강령은 따로 만들지 않았고,[9] 기관지에 게재된 매니페스토로 대신했다. 조직도 엄격한 전위당 중집체제를 강요하지 않고 느슨한 편이었다. 이는 조직화도 대중투쟁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발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10] 제1차 분트의 맹원 수는 설립 시점에서 약 300명, 1959년 9월 시점에서 약 1400명, 60년 안보 때는 약 3000명 정도였다. 하야시 미치요시, 니시베 스스무, 가라타니 고진, 히라오카 마사아키, 카토 히사타케, 나가사키 히로시 등도 젊은 활동가 중에 있었다.
1959년 6월, 분트 맹원 카로우지 켄타로[11]가 전학련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1960년까지 분트가 전학련을 주도하게 된다. 카로우지는 전학련 위원장 취임 때 “천진난만하게 데모·파업을 합시다”라고 말했다.[12] 제1차 분트의 행동양태는 기존의 좌익교조주의적 리고리즘(rigorism)과는 차별화된 것이었으며, 언론이 이들을 비난하는 수사도 “붉은 태양족”, “붉은 천둥족”등 그전까지 좌익을 공격하는 것과는 이질적이었다.
3. 2. 60년 안보 투쟁 (1959-1960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일미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추진하면서, 일본 사회는 큰 논란에 휩싸였다. 개정 반대파와 추진파 모두 조약 내용보다는 "평화", "민주주의", "휴머니즘", "진보주의" 등 전후 체제의 이념을 둘러싼 경쟁을 벌였다.[74] 분트는 이러한 상황에서 전학련을 주도하며 안보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1959년 8월, 분트는 제3회 대회에서 “분트를 모두 처넣어 싸울 것”을 결의했다. 11월 27일, 총평・사회당 등 2만 수천 명의 국민회의와 5천 명의 전학련이 통일행동을 취해 국회 정문을 뚫고 의사당 구내에 진입했다.
1960년 1월 16일, 정부대표단 도미 저지를 위해 하네다공항 농성을 벌이다 카로우지 켄타로 등 간부 대부분을 포함한 77명이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전학련"이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지만, 자민당은 전학련 특별입법을 제안하고, 사민당은 안보공투에서 전학련 배제를 주장하고, 공산당은 반혁명적 도발이라고 비난하는 등 반발과 비난도 컸다. 4월 26일, 국회 채플센터 앞에서 주류 전학련 1만 명이 모였고, 분트 지도부는 이 투쟁에 명운을 걸었다. 전학련 위원장 카로우지 켄타로가 차벽을 넘고 학생 3천 명이 뒤를 이었지만, 이 투쟁을 기점으로 분트는 분열되기 시작했다.[75]
5월 19일, 국회에서 날치기를 하기 위한 자민당의 우익집단 투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5월 26일, 17만 명의 시위가 국회 앞에서 발생했지만, 전학련은 통일행동에 매몰되어 휩쓸렸다.
6월 4일, 국철노동조합이 정치파업을 벌이고, 마루야마 마사오가 「행동으로」라는 글을 쓰고, 츠루미 슌스케 등이 "소리없는 소리회(베평련의 전신)"를 결성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6월 행동위원회를 만들어 분트 전학련과 동반했다. 이시하라 신타로, 오에 겐자부로 등은 "젊은 일본회"를 결성했다. 6월 15일, 전학련 주류는 키타코우지 사토시의 지휘 아래 국회 구내에 진입해 집회를 진행했지만, 기동대에 의한 강제해산 과정에서 칸바 미치코가 사망했다.
칸바의 죽음에 항의하여 대학에서 많은 파업이 진행되었고, 6월 18일 국회 앞에서 학생・노동자・시민 33만 명의 밤샘 포위 시위가 발생했다. 기시 내각은 일미안보조약을 자연발효시킨 후 총사퇴했다.
분트는 투쟁이 커질수록 비운동권의 참여가 늘어나고, 피아 갈등이 커지면서 조직 통일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1960년 7월 29일 제5회 대회를 실시했지만, 60년 안보의 평가를 둘러싸고 분규하는 중 형해화되어 이후 통일된 행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 3. 제1차 분트 해산 (1960년)
1960년 7월, 미일 안보 조약 저지를 위한 안보 투쟁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 속에서, 전공투는 여러 파벌로 분열되었다.[17] 이 투쟁을 경계로 분트는 중앙에서 말단 세포에 이르기까지 해산 상태에 빠졌다.[17] 이후 분열된 파벌들은 신좌파의 여러 학생 "파"를 형성하였고, 1968–69년 일본 대학 시위, 1970년 안보 투쟁,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반대 투쟁인 산리즈카 투쟁과 같은 활동을 벌였다.
3. 4. 제2차 분트 결성 (1966년)
1960년 7월, 전국적인 분트 조직이 분열된 후에도, 간사이 지방에서는 '간사이 지방위원회'가 분열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1962년에는 '간사이 공산동'(간사이 분트)이 결성되었다.[24] 간토에서는 분트가 아닌 이른바 '하부 조직'인 사학동(사회주의 학생 동맹)의 결성이 다양한 배경을 가지면서 극소수의 인원으로 진행되었고[25], 최종적으로 주오 대학·메이지 대학을 중심으로 한 독립 사학동[26]이 간사이 분트와 1965년 6월, 통일위원회를 형성했다.
이와타 히로시의 '세계 자본주의론'을 기반으로 한 마르크스주의 전선파(마르전파)[27]가 통일위원회와 합동하여 1966년 9월, 재건 제6회 대회를 열어 제2차 분트가 결성되었고,[28] 이와타 히로시의 『세계 자본주의론』, '생활과 권리의 실력 방위' 등의 내용이 강령적인 내용이 되었다. 같은 달, 전학련 재건 준비회가 열려 "전국의 대중적인 학생 자치회의 연합에 의한 철저한 대중 투쟁을 벌인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른바 삼파 전학련[29]이 재건되었고, 35개 대학 178개 자치회가 참가하여 1966년 12월, 메이지 대학 기념 강당에서 대회를 열었다. 연인원 3000명이었다고 한다.[30]
제2차 분트는 이후 다른 두 급진 학생 분파인 중핵파와 해방파와 합류하여 1960년대 후반에 여러 차례 폭력적인 시위 활동을 벌인 "삼파 전학련"(''Sanpa Zengakuren'')을 결성했다.
3. 5. 가두투쟁의 시대 (1967-1969년)
1960년대 후반의 격렬한 정치 활동은 1967년 10월 8일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베트남 방문 저지(제1차 하네다 사건)에서 시작되었다.[32] 이 사건에서 처음으로 헬멧과 각목[33]이 공공연히 등장했고, 삼파 전학련 소속 2000명이 기동대와 격렬하게 충돌하여 58명이 검거되었다.[34] 1967년 11월 3일에는 삼파 전학련이 산리즈카 투쟁에 조직적으로 처음 참가했다. 1967년 11월 12일에는 3000명이 모인 제2차 하네다 투쟁에서 347명이 검거되었다.[35]
1968년 1월에는 사세보 엔터프라이즈 기항 저지 투쟁이 있었다. 도쿄와 현지에서 항의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1월 17일에는 삼파 전학련 1500명이 사세보에서 기동대 1400명과 격돌했다. 사세보 시민도 삼파 전학련을 응원했다고 한다. 1월 18일에는 사공 공동 주최로 사세보에서 5만 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 1월 19일에는 도쿄 히비야에서 낮에는 1만 명, 밤에는 5천 명 규모의 집회와 데모가 있었다. 같은 날, 사회학동 250명은 외무성 4층에 난입하여 89명이 체포되었다. 2월 26일에는 산리즈카 공항 실력 분쇄 현지 총궐기 집회가 열렸다. 반대 동맹 1천 명, 삼파 학생 1600명 등 3000명이 모였다. 3월에는 오지 야전 병원 설치 저지 투쟁이 있었고, 삼파 계열 전학련 1500명이 모여 150명이 체포되었다. 이 무렵부터 '시민'이 아닌 '군중'이 등장하여 5000명이 기동대를 포위하고 투석을 했다. 이러한 투쟁마다 대량 체포가 당연시되었다.
이 시기까지 가두 투쟁을 주도한 것은 각 당파의 활동가 집단이었지만, 배후에서는 '무언가 엄청난 양적·질적 확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도쿄에서 열린 데모 대열 옆의 보도에는 언제나 엄청난 '구경꾼'이 있었다. 도쿄 대학 분쟁이 격화되고, 무풍 지대였던 최대 규모의 니혼 대학에서도 1968년 가을에는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전까지 거의 보이지 않던 무당파 활동가가 대거 등장하면서 '논섹트·래디컬'이라는 말도 나오게 되었다.[36] 1968년 11월 22일에는 도쿄대 혼고 구내에서 도쿄대·니혼대 투쟁 승리 전국 학생 총궐기 대회가 열려 학생 2만 명이 참가했다.[37]
1968년 10월 8일과 21일에는 신주쿠에서 미군 탱크차 운행 저지 투쟁이 있었다. 특히 21일 국제 반전 데이에는 신주쿠역 앞에 군중과 구경꾼이 10만 명이나 모여 신주쿠 이세탄 앞까지 가득 찼다. 이 과정에서 750명이 체포되었고, 소요죄가 적용되었다(신주쿠 소란). 같은 날, 사회학동 학생들은 방위청 앞에서도 돌입을 시도했다.[38] 이 과정에서 전학련 위원장 후지모토 도시오가 검거되었다.
3. 6. 전공투 시대와 제2차 분트 해산 (1969-1970년)
1969년, 시오미 다카야가 이끄는 적군파가 분트에서 분리되었다.[52] 이들은 '전단계봉기론'을 주장하며 4.28 오키나와 반전데이 투쟁에 참여했다. 같은 해 4월 28일, 학생 1만여 명이 가스미가세키 점거를 목표로 도쿄역, 신바시역, 오차노미즈역 등에서 무장 데모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분트 의장 사라기 등에게 파괴활동방지법이 개인 적용되었다.[53] 이는 분트 조직 약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1969년 7월 6일, 시오미가 이끄는 적군파 150~200명이 도쿄의과치과대학에서 총궐기집회를 가진 뒤, 메이지대학 이즈미캠퍼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분트 합동회의장을 장악했다. 이들은 지명수배 중이던 사라기 의장을 의자에 묶고 폭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라기는 체포되었다. 다음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앙대학교 반기파 100~150명이 도쿄의과치과대학으로 가서 시오미 등 적군파 멤버를 납치, 중앙대 학관에 2주일간 감금했다. 이때 시오미 등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던 도시샤 대학생 모치즈키 조시가 추락하여 사망했는데, 이는 신좌익 내부 분쟁에 의한 첫 사망자였다.[54] 이 사건으로 제2차 분트의 분열은 결정적이 되었고, 1969년 8월 22일 분트 제9회 대회에서 적군파 간부 12명이 제명되었다.
1970년 6월, 도시마 공회당에서 열린 정치집회에서 반기파,[55] 정황파,[56] 아라 타이스케의 전기파[57]가 공개적으로 대립했다. 6월 14일에는 반기파와 정황파가 요요기 공원 집회장에서 충돌했다.
이로써 제2차 분트는 재건 4년여 만에 완전히 분열되었고,[58] 여러 정파로 분열되어 전체적으로 세력을 잃었다.
4. 주요 분파
5. 1970년대 이후
70년 안보 투쟁 이후, 신좌파 운동이 급속히 쇠퇴하면서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은 사분오열되었다. 적군파, 전기파, 반기파, 정황파, 봉화파 등 십여 개의 정파로 분열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과격한 무장투쟁 노선을 추구했다.[95] 적군파와 전기파는 무장투쟁 노선에서 공통점을 가졌지만, 주도권을 둘러싸고 정파 투쟁을 벌였다. 반기파와 정황파는 무장투쟁에 반대하며 적군파 및 전기파와 대립했다.
대보살고개 사건으로 일본 내 전단계 무장봉기가 불가능해진 적군파는 국제근거지론에 따라 국외로 눈을 돌렸다. 요도 호 사건을 일으켜 북한으로 망명했으나, 일본 내 적군파 중앙위원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지도부가 소멸했다.[96] 잔당 일부는 아랍 지역에 국제근거지를 마련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과 연대하는 일본적군을 결성했다.[96] 일본 내에 잔류한 적군파는 케이힌 안보공투와 통합하여 연합적군을 결성, 산악베이스 사건이나 아사마 산장 사건과 같은 엽기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1970년대 이후 학생운동이 퇴조하면서도, 일부 대학에서는 분트 학생조직이 탈정파화된 형태로 남아 1990년대까지 붉은 헬멧을 사용하며 "적헬 논섹트"로 불렸다.
1980년대 사회주의노동자당(사로당)은 4시간 노동제 실현을 내걸고 선거에 도전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분열을 거쳐 노동의 해방을 노리는 노동자당으로 개칭되었다. 공산동 ML파의 계보를 잇는 마르크스주의 청년동맹은 「힘내자, 일본!」국민협의회를 자처하며 우익으로 전향했다.
전기파는 1973년 폭탄 투쟁 이후 휴가파와 니시다파로 분열했다. 휴가파는 분트(BUND), 악티오 네트워크로 개칭하며 생태주의 시민단체로 전환했다. 니시다파는 봉화파와 합병하여 공산주의자동맹 (통일위원회)가 되었다. 제2차 분트 분열 시 파생된 혁기파는 일공ML과 통합하여 노동자공산당을 창당했다.
제2차 분트 분열 이후의 계통도는 다음과 같다.
파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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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파 |
반기파 |
전기파 |
봉화파 |
적군파 |
파벌 (분열 이후) |
원방파 |
유격파 |
전기파 |
철의전선파 |
봉화파 |
일본적군 |
연합적군 |
파벌 (재분열 이후) |
휴가파 |
니시다파 |
봉기파 |
ML파 |
볼셰비키파 |
프로독파 |
파벌 (최종) |
혁명의 기파 |
홍기파 |
분트(BUND) |
혁기파 |
일공ML |
악티오 |
공동 미래 |
노동자공산당 |
혁명21 (준) |
참조
[1]
書적
反システム運動
大村書店
1992
[2]
서적
安保全学連
三一書房
1969
[3]
웹사이트
共産主義者同盟結成大会議案(1958年12月)
https://web.archive.[...]
[4]
서적
わかりやすい極左・右翼・日本共産党用語集 三訂
立花書房
2008
[5]
웹사이트
『新版・日本の戦闘的左翼』
https://web.archive.[...]
現代史研究所
1968
[6]
서적
戦後日本共産党史
芳賀書店
1966
[7]
서적
戦後左翼の秘密 60年安保世代からの証言
潮文社
1980
[8]
서적
60年安保センチメンタルジャーニー
洋泉社
1986
[9]
기타
[10]
서적
武井昭夫論集③(層としての学生運動)
スペース伽耶
2005
[11]
서적
60年安保センチメンタルジャーニー
[12]
기타
[13]
기타
[14]
서적
60年安保センチメンタルジャーニー
洋泉社
1986
[15]
기타
[16]
뉴스
2人は12月10日の第9次統一行動のデモ行進に参加して逮捕された
週刊『前進』
2014-12-15
[17]
서적
我かく闘えり 破防法闘争32年
情況出版
2001
[18]
서적
我かく闘えり 破防法闘争32年
情況出版
2001
[19]
기타
[20]
서적
ブント書記長島成郎を読む―島成郎と60年安保の時代〈1〉
情況出版
2002
[21]
서적
ブント書記長島成郎を読む―島成郎と60年安保の時代〈1〉
情況出版
2002
[22]
기타
[23]
기타
[24]
기타
[25]
기타
[26]
기타
[27]
기타
[28]
기타
[29]
기타
[30]
기타
[31]
웹사이트
まつぼっくりの会の定款
https://www.npo-home[...]
内閣府
2020-10-26
[32]
기타
[33]
기타
[34]
기타
[35]
기타
[36]
문서
[37]
문서
[38]
문서
[39]
서적
安田講堂 1968‐1969
中央公論新書
2005
[40]
서적
思想としての全共闘世代
ちくま新書
2006
[41]
문서
[42]
간행물
〈逃走〉するものの〈知〉
中央公論
1984-09
[43]
문서
[44]
문서
[45]
문서
[46]
문서
[47]
문서
[48]
문서
[49]
문서
[50]
문서
[51]
문서
[52]
문서
[53]
문서
[54]
문서
[55]
문서
[56]
문서
[57]
문서
[58]
문서
[59]
문서
[60]
문서
[61]
문서
[62]
문서
[63]
문서
[64]
문서
[65]
웹인용
共産主義者同盟結成大会議案(1958年12月)
https://web.archive.[...]
2020-04-08
[66]
문서
[67]
웹사이트
『新版・日本の戦闘的左翼』小山弘健編 現代史研究所 1968年
http://www.geocities[...]
2017-01-02
[68]
서적
戦後日本共産党史
芳賀書店
1966
[69]
서적
戦後左翼の秘密 60年安保世代からの証言
潮文社
1980
[70]
서적
私の履歴書 人生越境ゲーム
日本経済新聞出版社
2008
[71]
서적
『60年安保センチメンタルジャーニー』
洋泉社
1986
[72]
논문
타케이의 전후 학생운동 초창기에 관한 논고
スペース伽耶
2005
[73]
서적
『革命的な、あまりに革命的なー1968年の革命試論』
作品社
2003
[74]
간행물
吉本隆明の「戦後世代の政治思想」
1960-01-01
[75]
간행물
蔵田計成「ブント主義ー倍々ゲームの陥穽」
情況出版
2001
[76]
간행물
蔵田計成「ブント主義ー倍々ゲームの陥穽」pp64-65
情況出版
2001
[77]
서적
『ブント書記長島成郎を読む―島成郎と60年安保の時代〈1〉』
情況出版
2002
[78]
서적
『ブント書記長島成郎を読む―島成郎と60年安保の時代〈1〉』
情況出版
2002
[79]
기타
塩見孝也
2003
[80]
논문
福地茂樹の論文
情況出版
2002
[81]
서적
『中上健次発言集成5』p138-9
[82]
서적
『 安田講堂 1968‐1969』
中央公論新書
2005
[83]
서적
『私の1960年代』
2015
[84]
서적
『思想としての全共闘世代』
ちくま新書
2006
[85]
기타
神津陽、荒岱介、古賀暹 인터뷰
2007
[86]
기타
神津陽
2007
[87]
웹사이트
http://homepage2.nif[...]
[88]
간행물
府川充男『覚書=「歴史的対象」としての第二次ブントと赤軍派』
2008-05-01
[89]
기타
荒岱介
2005
[90]
서적
『哲学者廣松渉の告白的回想録』
河出書房新社
2006
[91]
기타
小嵐p278-283
[92]
기타
小嵐p80
[93]
기타
府川充男
2006
[94]
기타
塩見孝也
2003
[95]
기타
塩見孝也
2003
[96]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video.google.[...]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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